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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

[잊혀지는 손끝의 기술] 옻칠(木漆)의 세계, 40년 장인의 이야기

by 최미나 에디터 2025. 4. 24.

1.  사라져가는 기술과 그 안의 사람들

한국에는 오랜 시간 동안 전해져온 전통 기술들이 많다.

그러나 빠르게 변화하는 현대 사회 속에서, 그 기술들은 더 이상 환영받지 못하고 있다.

자동화된 기계, 공장에서 찍어낸 대량 생산품, 시간과 비용을 절감하는 유통 구조 속에서 손으로 만드는 것의 가치는 점점 잊혀지고 있다. 특히 옻칠, 소반, 갓, 한지 공예 등은 대표적인 ‘사라져가는 손기술’로 분류된다.

 

이 글에서는 그중에서도 ‘옻칠’이라는 전통 기술에 평생을 바쳐온 한 장인의 이야기를 통해, 기술이 아니라 삶의 철학을 들여다보고자 한다. 단순히 옻칠의 기능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그 기술을 지켜온 사람의 손끝에서 흘러나온 정신과 문화를 조명한다.


2. 옻칠이란 무엇인가 – 전통 기술의 정체

옻칠은 동아시아 문화권에서만 존재하는 특별한 도료 기술이다.

옻나무에서 채취한 수액을 가공하여 그릇, 가구, 악기 등에 칠을 하는 기술로, 내구성, 방수성, 항균 기능이 매우 뛰어나다.
한국의 옻칠 기술은 고려 시대부터 발전해왔고, 특히 조선시대에는 궁중과 사대부 가문에서 고급 장식재로 애용되었다.

옻칠은 단순한 페인트가 아니다.


하나의 물건을 옻칠로 마감하기 위해서는 수십 번의 칠과 건조, 연마 작업이 반복된다.
그 과정은 기계로 대체할 수 없고, 온도, 습도, 시간, 사람의 감각에 의존해야 하기 때문에
한 점의 완성품을 만들기까지 최소 한 달 이상이 걸리기도 한다.

 

이 기술은 시간과 정성을 필요로 하고, 그만큼 결과물 하나하나가 예술 작품에 가까운 고유성을 가진다.

 

3. 40년 옻칠 장인의 삶 – 기술보다 사람

전라북도 남원에 있는 조용한 시골 마을에는
지금도 전통 방식 그대로 옻칠 공예를 이어가는 장인이 있다.
그의 이름은 김○○ 옻칠 장인, 올해로 68세.
그는 20대 초반에 처음 옻나무 수액을 만졌고,
그때의 한 방울이 그의 인생 전체를 바꿔놓았다.

김 장인은 스스로를 “기술자”가 아니라 “삶을 옻칠하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그는 화려한 수상 경력이나 전시 이력보다,
하루하루 작업대 앞에 앉아 칠을 반복했던 시간들을 더 자랑스러워한다.

“옻은 성격이 급하면 다 틀어져버려.
빨리하려고 손을 대면 얼룩지고, 갈라지고, 처음부터 다시야.
옻칠은 결국 사람을 천천히 살게 만들어.”

그의 하루는 이렇다.
아침 6시에 공방 문을 열고, 전날 올린 칠의 상태를 확인한다.
기온과 습도를 기록한 뒤, 칠할 나무의 결을 손으로 만지며 이야기한다.
옻칠은 붓질보다도 손의 감각이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재료의 온기, 나뭇결의 방향, 수액의 농도는 매번 다르기 때문에, 기계적으로는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는 한 번의 옻칠을 마치면 최소 3일을 말리고,
다시 연마하고 또 칠을 올린다. 그렇게 반복하는 과정을 거쳐
하나의 그릇이 완성되기까지 보통 30~50일, 길게는 100일이 넘는 경우도 있다.

김 장인은 이 작업을 40년 넘게 해왔지만,
그의 손에는 아직도 작은 옻 반응 흔적들이 남아 있다.
그는 알레르기가 있어도 보호 장갑을 끼지 않는다.
왜냐면 “손으로 만졌을 때 나무가 살아 있는지 아닌지 바로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그의 옻칠 작품은 이름이 없다.
팔지 않기도 한다. 대부분은 소박한 상이나 작은 숟가락, 도마처럼 실용적인 물건들이다.
그는 말한다.

“나는 나를 위해서 옻칠하지 않아.
누가 그걸 써주고 오래 곁에 두면,
그게 나한테는 제일 고마운 일이야.”


김 장인의 공방엔 아직도 손때 묻은 목제 도구들이 가득하고,
그곳에는 소음 대신 천천히 묻어나는 기름 냄새, 나무 냄새, 그리고 고요함이 함께 있다.

 

4. 사라지는 이유, 그리고 남겨야 할 이유

옻칠은 수천 년의 시간을 지나온 고유한 기술이지만,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는 점점 더 자취를 감추고 있다.
전통 기술이 사라지는 이유는 단순하지 않다.
기술의 속도, 사회의 변화, 사람들의 관심, 이 모든 것이 맞물려 작용한다.


❌ 왜 사라지고 있을까?

  1.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린다
    – 옻칠은 공장식 생산과는 반대되는 개념이다.
    빠르게 만들고 빠르게 유통하는 현대 소비 구조에서는
    30일 넘게 걸리는 공예는 ‘비효율’로 취급된다.
  2. 젊은 세대가 배우지 않으려 한다
    – 기술을 이어가려면 후계자가 필요하다.
    하지만 대부분의 젊은이는 수입이 불확실하고 고된 수작업인 전통 기술에
    진입할 용기를 내지 못한다.
  3. 수요가 줄어들고 있다
    – 소비자들은 예쁘고 저렴한 공산품을 더 쉽게 선택한다.
    전통 옻칠 그릇보다 스테인리스, 플라스틱, 유리 제품이 더 싸고 편하다.
  4. 기술에 대한 사회적 무관심
    – 뉴스나 교육 현장, 미디어에서조차 전통 기술은 역사책 속 유물처럼 소개된다.
    지금도 살아 있는 기술이라는 사실은 점점 잊혀져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왜 이 기술을 남겨야 할까?

옻칠은 단순한 칠 기술이 아니다.
그 안에는 한국인의 손끝 철학, 시간과 정성의 미학, 자연을 다루는 방식이 담겨 있다.
하나의 물건이 만들어지기까지 수십 번을 덧입히고, 다듬고, 기다리는 과정을 통해
‘빨리빨리’ 문화 속에서 잊혀진 인내와 고요의 미학을 되새기게 한다.

이 기술이 사라진다는 것은,
단지 물건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한 세대의 삶의 태도와 정신이 함께 사라진다는 뜻이다.

옻칠은 가르칠 수 있어도,
‘천천히 사는 법’은 체득하지 않으면 알 수 없다.
그래서 이 기술은 단순히 ‘기능’이 아니라 ‘삶의 방식’이다.


🛠️ 전통 기술은 과거가 아니라 ‘지금’이다

사람들은 종종 전통을 ‘지켜야 할 과거’로만 생각한다.
하지만 김 장인의 말처럼,

“기술은 손에 있지만, 정신은 오늘에도 살아 있어야 한다.”

전통 기술은 계승되어야 할 ‘살아 있는 문화’이며,
지금 우리의 삶 속에서 다시 쓰여야 할 철학
이다.

 

5. 전통 기술의 현대적 가치 – 계승과 재해석

사람들은 종종 전통 기술을 ‘과거의 것’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진짜 중요한 질문은 이것이다.
“지금, 우리는 그 기술로 무엇을 할 수 있는가?”


🔄 전통 기술은 지금도 ‘재해석’되고 있다

요즘 젊은 공예가들 사이에서는 전통 옻칠을 현대 디자인과 결합하려는 시도가 활발하다.

  • 심플한 옻칠 머그잔,
  • 옻칠한 무선 스피커 케이스,
  • 미니멀한 곡선의 옻칠 조명 디자인.

이 모든 건 과거의 기술을 지금의 라이프스타일에 맞게 재해석한 결과물이다.

어떤 젊은 디자이너는 말한다.

“전통 기술은 고리타분한 게 아니에요.
그 안에 이미 다 들어 있어요.
느림, 지속성, 자연, 손의 감각.
지금이 오히려 더 필요하죠.”


🧑‍🎨 옻칠은 ‘명상하는 기술’이다

김 장인은 말한다.

“요즘 사람들은 너무 빨리 움직여요.
옻칠은 하루에 딱 한 번만 칠할 수 있어요.
하루에 한 번뿐이라는 게,
지금 시대에는 얼마나 귀한 일인지 알아요?”

이 말은 단순히 작업의 제약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삶의 속도를 줄이고, 물건에 마음을 담는다는 태도 자체가 가치인 시대가 온 것이다.

바로 그 점에서, 옻칠은 **단순한 전통 기술이 아니라,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마음의 기술’**이 될 수 있다.


🌱 계승이란 ‘복사’가 아니라 ‘진화’다

전통 기술을 이어간다는 건,
그대로 흉내 낸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 안에 담긴 정신을 지금 시대의 언어로 번역하는 것이 진짜 계승이다.

  • 옻칠의 ‘한 땀 한 땀’은 지금의 ‘슬로우 라이프’가 된다.
  • 장인의 손맛은 ‘핸드메이드 감성’으로 확장된다.
  • 오래 쓰고 고치는 철학은 ‘지속 가능한 소비’와 연결된다.

이처럼 전통 기술은
지금 우리가 잃어버린 감각을 다시 꺼내주는 문화적 거울이다.


옻칠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잊히고 있을 뿐, 다시 꺼내 쓰면 된다.
그 기술은 이미 우리 안에 있고,
지금의 언어로 번역될 준비가 되어 있다.


전통 기술을 이야기하는 것은 단순한 ‘기록’이 아니라
우리 삶에 무엇을 되살릴 수 있는지를 묻는 일이다.
손끝에서 이어지는 기술은, 사실 우리의 삶을 천천히 가꾸는 또 하나의 방식일지 모른다.